알고리즘이 만든 평평한 세계… 우리는 취향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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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20. 오후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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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 전속 작가가 본 알고리즘


필터월드

카일 차이카 지음 | 김익성 옮김 | 미래의창 | 432쪽 | 2만1000원

유튜브에서 밀양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를 폭로하는 동영상을 몇 번 클릭했더니 얼굴 없는 ‘사이버 레커’(온라인에서 특정 이슈에 대한 자극적인 콘텐츠를 제작하고 빠르게 퍼뜨리는 이들)에 대해 기존 ‘얼굴 알려진 레커’가 공격하는 영상이 맨 위에 떴고, 얼마 뒤 그 레커가 인기 여성 유튜버를 협박했다는 폭로 영상이 보였다. 모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튜브의 알고리즘, 즉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결과를 도출하는 규칙이 작동해 동영상을 추천한 것이다.

지금 물의를 빚는 레커들이 수많은 구독자를 지닌 인플루언서로 행세할 수 있었청 기록과 ‘좋아요’를 토대로 한 알고리즘 덕이 컸다. 그런데 올 상반기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원제 Filterworld)은 이렇게 말한다. “‘좋아요’를 부르는 감정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 본능의 일부로, 스크롤해서 다음 피드로 내려가기 전에 감정이 한순간에 일어나야 한다. 무언가를 숙고하고 있다거나 결론을 내리기 위해 고민할 필요도 없다.”

밀레니얼 세대로서 ‘뉴요커’ 전속 작가인 저자는 오늘날 우리는 온갖 알고리즘과 마주하면서 각자의 독특한 취향을 잃어버린 채 그것에 휘둘리고 있다고 짚는다. 구글 검색으로 찾아보는 웹사이트, 페이스북에 접속하자마자 읽게 되는 스토리, X(구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이 펼쳐내는 게시물, 넷플릭스 홈페이지가 추천해 주는 영화, 에어비앤비가 제시하는 숙소처럼 알고리즘은 PC와 스마트폰 속 온라인 세상 곳곳과 연관돼 있다. 제목의 ‘필터월드’란 이렇게 방대하고 서로 얽힌 알고리즘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세상을 말한다. 이것이 불과 지난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뤄졌다.

틱톡에 접속하면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영상이 툭 튀어나오고,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면 내가 필요한 물건들이 추천되는가 하면, 세계 어느 휴가지에서도 구글 지도를 켜면 나에게 맞는 분위기의 커피숍이 근처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도 미처 몰랐던 내 취향을 알고리즘이 미리 알아서 챙겨 주다니!” 일일이 검색하고 찾아 다닐 필요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하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는 “세계 여러 도시에서 찾은 카페들이 황망한 기시감을 안겨줬다”고 말한다. 흰색 도기 타일로 마감한 벽, 재생 목재로 만든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의 테이블, 20세기 중엽 모던 스타일의 의자, 길게 늘어진 줄에 매달린 백열전구, 모두 ‘인스타 감성’의 대표적인 심미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예쁘고 수수해 보이지만 고만고만하고 별 특징 없이 무난한 콘텐츠가 알고리즘의 바다를 장악하고 있다는 얘기다. ‘필터월드’ 속 동질성은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할뿐더러, 종종 우리를 잘못 이해해서 엉뚱한 사람과 연결해주거나 잘못된 콘텐츠를 추천해 주고, 원치 않는 습관을 부추기기도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알고리즘의 작동은 광고를 통한 돈벌이 수단이라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005년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를 썼지만, 20년이 지난 이제는 알고리즘이 세계를 지나치게 평평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좀처럼 알고리즘에서 벗어날 마음을 먹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독성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가진 문화적·정치적·사회적 편향을 미묘한 방식으로 더 확실하게 만들어 주며, 급기야 이런 질문까지 스스로에게 하도록 만든다. “알고리즘이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나는 과연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알고리즘에 맞서 우리의 자유의지와 창조성과 취향을 지켜낼 수 있을까. 저자는 ‘기계가 아닌 인간에 의한 큐레이션을 되살려야 한다’며 미술관의 유능한 큐레이터, 라디오방송국의 창의적인 DJ, 예술영화 전문 브랜드 크라이테리언과 클래식 스트리밍 서비스인 이다지오의 예를 든다. 별 생각 없이 알고리즘에 몸을 맡기지 말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문화 향유자의 입장에서 고급 큐레이션을 활용하라는 조언이다.

하지만 그런 ‘주체적 문화 향유자’의 입장에선 알고리즘 역시 활용 가능한 수단이 되지 않을까. 얼마 전,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초기 실황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목격하고 놀랐는데, 거기엔 이런 한글 댓글이 맨 위에 걸려 있었다. ‘날 여기로 데려다 준 알고리즘, 아주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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